광산구 역사기행 / 광산구 알고 알리고 시즌 Ⅱ
노기욱과 함께하는 어등산 의병 열전
입력 : 2023. 08. 07(월)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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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저널] 광산저널 TV는 42만 광산구민이 지역의 역사를 알고 이를 전국에 알리기 위해 ‘광산구 역사기행 시즌 Ⅱ’를 준비했다

이번 시즌 Ⅱ는 노기욱과 함께하는 어등산 의병 열전으로 광산구 박호동 박뫼마을이 호남 의병 그리고 5.18 민주 항쟁까지 이어지는 나라를 위한 의병으로 산화한 고귀한 의병의 이야기를 찾아 나섰다.

광산구 박호동 박뫼마을 양씨 일가의 역사적인 의병 활동과 의병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어등산의 생생한 현장을 기록했다.

노기욱 호남의병연구소장의 역사적인 고증과 이현선 전 광산문화원장, 양 씨 문중의 후손인 양승구 박사가 말하는 호남 의병 그리고 광산구의 뿌리에 대해서 ‘광산구 알고 알리고 시즌 Ⅱ’의 문을 연다. /편집자 주

“광산구 박호동 박뫼마을 호남 의병 발원지”
을묘왜변, 양응정이 최초로 양달사 의병에 나서게 해
임진왜란, 양산숙 광산 의병 이끌고 진주성 전투 참여
병자호란, 양만용·사촌형 양원용, 조카 양진남 의병 활동
아버지 아들 손자에 이르기까지 3대를 이어 의병 배출

광산구 박호동 박뫼마을은 을묘왜변에 양응정이 양달사를 의병에 나서게 하였습니다. 임진왜란에는 양산숙이 광산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에서 혈전을 치루고 순절했다. 1636년 병자호란에 양만용과 사촌형 양원용, 조카 양진남과 의병 활동을 펼쳤다. 박뫼마을은 아버지 아들 손자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 의병을 배출한 진정 의병의 발원지라 할 수 있다.

제 1회차 어등산에 핀 의병의 혼 붉은 동백
1. 임진왜란이 발발
▶을묘왜변, 임진왜란 전초전 대규모 왜구 침입
1555년(명종 10) 5월 11일 을묘왜변이 발발하면서 대규모 왜구에 의하여 완도와 영암 일대가 유린되었습니다. 이때 송천 양응정은 어머니 상중에 시묘살이 중이던 양달사 형제에게 의병을 일으키라는 편지를 보내 조선 최초 의병을 일으켜 승전하게 하였습니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군 선발대가 다대포를 공격하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다음날 오전 부산진성, 오후 다대포가 함락되고, 4월 15일 동래성이 함락되면서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상륙하게 됩니다. 4월 15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임진왜란 개전 소식을 듣게 됩니다. 12일 후 4월 27일 좌부승지 민준(閔濬)이 보낸 서장에 “조정은 멀리서 지휘할 수 없으니 도내에 있는 지휘관의 판단에 맡긴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주성 전투 광산구 출신 다수 의병지도자 순절
4월 30일 좌부승지 민준이 보낸 다른 서장에는 “각 포구의 병선들을 거느리고 급히 출전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출전 명령에 따라 이순신 장군은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 병참선을 차단합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어등산 박산마을의 양산숙과 양산룡 형제는 즉시 김천일 휘하로 들어가 북상하여 경기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듬해 4월 다시 남하하여 진주성에 입성하게 됩니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양산숙 의병장과 함께 참전하여 순절한 광산 의병은, 고경신, 고경형, 고종후, 김응복, 박승남, 배승무, 범기생과 범기봉 형제, 오계수, 오빈, 오유, 유휘진, 이수익과 이수함 형제, 장수연, 정함과 정구 형제 등이 있었습니다. 광산의병은 스스로 전란 극복의 주역을 자임하였고, 평생 지향하였던 충절을 만천하에 나타내었습니다.

2 송천 양응정 조선의 회화나무가 되다.
▶‘남북제승대책’으로 남쪽의 왜구는 땅에 오르지 못하게 하고 북쪽의 여진은 귀순자를 회유
양응정(1519~1581) 62세의 일기로 살다 돌아갑니다. 자는 공섭, 호는 송천으로 홍문관 판교인 학포 양팽손의 아들입니다. 1540년(중종 35)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습니다. 이어서 1552년(명종 7)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로 벼슬길에 나간 뒤 홍문관부수찬, 예문관봉교, 예문관 대교를 거쳐 수찬에 올랐습니다. 이어 사간원, 사헌부, 공조, 예조, 병조 등을 두루 거쳤습니다. 을묘왜변 후 1556년(명종 11) 병조좌랑으로 문과 중시에서 남쪽 왜구를 수전으로 제압하고 북쪽 여진은 국경 수비를 튼튼히 하여 전쟁에 승리하는 방안인 ‘남북제승대책’이라는 글로 두 번째 장원 급제하였다. 남쪽 왜구는 땅에 오르지 못하게 하고 북쪽의 여진은 귀순자를 회유하여 울타리로 삼자는 것입니다.

▶중종, 송천 양응전 “문장 깊이가 강물과 같고 빛나는 문체가 호랑이 가죽만 하다” 칭찬
송천은 중종 임금께 매일 경서를 강회 하였는데, 중종 임금은 송천의 학문을 “문장 깊이가 강물과 같고 빛나는 문체가 호랑이 가죽만 하다.”라고 칭찬하였습니다. 1563년(명종 18) 순창군수에 부임하였다. 1565년(명종 20) 홍문관 수찬으로 영전하였습니다. 이후 광주목사와 진주목사를 거쳐, 1571년(선조 4) 경주 부윤, 1576년(선조 9)에 의주부윤으로 기용되었고, 1577년(선조 10)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성이 되었습니다. 명나라에 성절사로 갔을 때 중국의 신종황제가 선물로 준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를 가지고 와 심었던 것이 남나무로 불리는 묘역에서 500여 년간 푸르게 서 있는 이팝나무입니다.
송천선생은 이 후 황해감사에 임명되었으나 이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낙향하여 임류정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습니다. 정철, 백광훈, 최경창 등 지역의 명망 있는 학자들을 배출하였습니다. 김인후, 임억령 등과도 학문을 교류하였다. 그의 칭송하는 선정비가 광주 향교 비석거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절사로 명나라 다녀오면서 이팝나무를 가져와
‘양송천 묘역’(야외 촬영 1분)
광산구 동호동 산 32-2 ‘양송천 묘역’은 시지정기념물 제8호입니다. 이 묘역에는 450년 된 회화나무가 있습니다. 1577년(선조 10) 명나라에 성절사로 갔을 때 중국의 신종황제가 선물로 준 나무입니다. 송천은 “쌀밥나무로 불리는 이팝나무를 달라.”라고 하여 가지고 와 심은 것입니다. 절강지방 남쪽에서 왔다고 하여 남나무로 후손들을 불렀다고 전합니다. 송천 양응정은 백성들이 흰 쌀밥에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쌀밥나무를 묘역에 심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송천 양응정 묘역의 예장 석물과 묘비는 1581년(선조 14)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선조 임금이 내린 것입니다. 예장석으로 대리석에 미려한 조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묘역에는 차례로 그의 아들 충민공 양산숙과 그의 손자인 한림학사 양만용의 묘가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도비는 규장각 직제학 민병승이 지은 것입니다.

3 진주혈전과 양씨삼강문
▶양응정의 아들 양산숙 임진왜란 일자 창의
양산숙(1561~1593)은 32세의 일기로 순절한 의병장입니다. 자는 회원이고 아버지는 대사성 양응정입니다. 성혼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습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양산룡과 함께 창의하여 김천일 장군 부장이 되었습니다. 강화도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김천일의 밀서를 가지고 곽현과 함께 의주 행재소로 가서 선조 임금에게 의병의 활동과 적의 동태를 보고 하였습니다. 이에 선조 임금은 즉석에서 그를 공조좌랑에 임명하였습니다. 돌아올 때 가져온 교서를 호남과 영남 의병장에게 하달하였습니다. 이듬해 진주성으로 들어가 혈전을 벌입니다. 조선군 1만여 명과 일본군 9만 3천명이 주야로 9일 간에 걸친 1백여 회의 전투를 치르게 됩니다. 조정에서는 순절한 양산숙 의병장에게 좌승지를 추증하고 시호를 충민으로 내렸습니다.

▶양산룡은 운량장으로 활약
양산룡(1552~1597)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맞게 되자 김천일 휘하에 들어가 운량장이 되어 군량을 조달하였습니다. 김천일 장군이 강화도에 머무르고 있을 때 호남지방에서 곡식을 모아 일만여 명의 군량을 조달하는데 앞장섰습니다. 1593년(선조 26) 6월 29일 쏟아지는 빗속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아우 양산숙이 진주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는 비보를 듣게 됩니다. 그는 곧바로 초혼장을 치러 아버지 양응정의 묘 아래에 장사하였습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 피난길에 나서 일가족을 배에 태우고 지금의 몽탄강인 무안 삼향포에 다다랐습니다. 그런데 적선이 들이닥쳐 피할 수 없게 되자 가족들 모두가 바다에 몸을 던져 지조와 정절을 지켰습니다.

▷박뫼마을 의병의 상징 ‘양씨삼강문’
송천 양응정은 항시 말하기를 “학문의 뿌리를 충효에서 찾으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가르침에 따라 자녀들이 충효열을 실천하였습니다. 박뫼마을 양씨삼강문은 홍탁의 상소로 1635년(인조 13)에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건립되었습니다.
➊ 어머니 죽산 박씨, ➋ 진주성에서 순절한 의병장 양산숙, ➌ 피란 중 삼양포에서 순절한 양산숙의 처 광산 이씨, ➍ 피란 중 삼양포에서 순절한 양산룡, ➎ 피란 중 삼양포에서 순절한 양산룡 아내 고흥 유씨, ➏ 영상강에서 투신한 양산룡 딸 임환의 처, ➐ 피란 중 삼양포에서 순절한 아우 양산축, ➑ 피란 중 삼양포에서 순절한 누이 김광운처 제주양씨, ➒ 피란 중 삼양포에서 순절한 김두남의 처 등의 충·효·열행을 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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