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저널TV 광산의병 열전 4편] 광산 5·18 민주화운동 어등산 붉은 동백꽃으로 피다.
- “오늘 우리는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 (윤상원 열사 외신과 기자회견)
- 임곡동 출신 윤상원 열사
- 5.18 민주화운동 항쟁 지도부 대변인
- 계엄군 총탄 맞아 30살 일기로 사망
- 민주주의 발전 공로 국민훈장 모란장
- 임곡동 출신 윤상원 열사
- 5.18 민주화운동 항쟁 지도부 대변인
- 계엄군 총탄 맞아 30살 일기로 사망
- 민주주의 발전 공로 국민훈장 모란장
입력 : 2023. 11. 13(월) 10:29

[광산저널] 광산은 의병의 발원지로 충절의 고장이자 민족의 정기가 면면히 흐르는 곳이다. 역사적으로 나라가 어려움에 부닥칠 때 분연히 일어서고 불의를 참지 못하고 초개같이 목숨을 버리면서 의로운 일에 나서는 민족의 뿌리이며 지역의 대표적인 의로운 일에 봉기하는 곳이기도 하다.
4·19혁명은 이승만 정부의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기 위해 국민과 학생이 시위에 나서면서 또 다른 의로운 역사를 시작됐다. 광주에서는 광주고를 필두로 전남여고, 광주여고, 광주공고, 조대부고, 숭일고 학생들이 시위에 나서면서 시작됐다.
1994년 발행한 광산구지(光山區紙) 347쪽 기록에 광주 5·18 민주화운동 상황이 잘 기록돼 있다.
5.18 민주화운동은 윤상원 열사와 조비오 신부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윤상원 열사는 광산구 임곡동 출신이고 조비오 신부는 광산구 북산동 북성마을 출신이다. 수천 년 역사에 면면히 이어지는 광산 의병의 핏줄. 광산은 의병의 발원지로 충절의 고장으로 5.18 민주화운동까지 이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이 확대되고 정치인과 민주인사 학생들이 체포됐다. 5월 18일 일요일 오전 계엄군이 배치되고 대학은 폐쇄되고 공수특전단이 점령했다. 학생들이 학교로 모여들면서 200여 명의 학생이 투석전을 벌이고 휴교령을 해제하라 계엄 해제를 외쳤다. 계엄군의 진압이 점점 잔혹해지면서 학생들은 더욱 조직적으로 대항하고 더 많은 공수부대원이 투입됐다. 공수부대원에 대한 소문은 광주 전역에 불길처럼 번져 가면서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5월 21일 오전 금남로에는 십만이 넘는 시민이 모여들었다. 무장의 필요성을 느낀 청년들이 아세아 자동차공장에서 차량을 가져왔다. 오후 5시경 도청을 향하여 무장한 시민군 대오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5월 21일부터 5월 26일에 걸쳐 4차례 민주 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있었다. 5월 27일 새벽 0시를 기해 전화가 끊겼다. 새벽 4시쯤 도청 앞은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됐다. 계엄군은 방송을 통해 항복 권유의 최후통첩을 했다. 새벽 여명은 광주의 한을 안고 떠오르고 있었다.
광산구 출신으로 5·18 민주화운동에 나선 대표적인 인물로는 윤상원과 조비오 신부이다.
♣윤상원(尹祥源, 1950~1980) 열사는 1950년 8월 19일 천동마을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임곡초등학교, 광주북성중학교, 광주살레시오고등학교, 전남대 정치학과를 나온 뒤 주택은행 서울 관악구 봉천동 지점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1978년 교육지표 사건이 터지자 광주로 내려와 광천공단 제조업체에 취업해 직장생활을 하며 노동자들을 위한 들불 야학을 시작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1980년 5월 18일 시위에 참여, 5월 20일부터 당시 광천동 성당의 '들불 야학' 동료 강학들과 함께 '투사회보’를 제작해 총 13회에 걸쳐 배포했다.
이후 5월 23일 ‘수습 대책 위원회’를 중심으로 시민군의 무기를 반납하자는 주장에 반대했다. 5월 25일 항쟁 지도부인 「시민․학생 투쟁 위원회」를 결성을 주도하고 전남도청을 장악하고 항쟁 지도부의 대변인직을 맡았다.
광산 의병, 윤상원 열사·조비오 신부까지 이어져
북산동 출신 조비오 신부
‘오월 사제’ 광주시민 무고한 희생 막기 위해 앞장
계엄군 무력 진압 맞서 ‘죽음의 행진’ 구속 옥고
5·18 진상 규명 과정 계엄군 헬기 사격 증언하기도
윤상원 열사는 5월 26일, 외신기자와의 회견에서 “오늘 우리는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회견 이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전남도청에 대한 공격에 앞서 시민과 학생 등을 먼저 대피시킨 후, 새벽 4시경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30살의 일기로 사망했다. 정부는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2022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박기순(1957.11.7~1978.12.26.)은 보성군 출신이다. 그는 보성여중과 전남여고를 졸업하고, 1976년 전남대 역사교육과에 진학했다. 1978년 6월 27일, 전남대 교수들이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했다. 선언문에 서명한 교수 전원을 체포됐다. 7월 5일 박기순은 시위 주동하고 조선대 정문까지 진행됐다. 시위 참여자 500여 명이 연행되었으며, 이 중 14명이 구속됐다. 전남대 3학년생이던 박기순은 이 사건으로 인해 학교에서 제적됐다. 박기순은 아시아자동차 하도급 업체 동신강건사에 취업해 1978년, 들불 야학을 열었다.
미국의 노동자들에게도 들불이 등장한다. 1884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 방직공장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다가, 폭동죄로 체포되어 5명이 사형에 처했다. 노동자 오거스트 스파이즈는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 하지만 불꽃은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누구도 이 들불을 끌 수 없으리라!”라고 하였다.
조비오 신부 배려로 박기순은 광천동성당 교리 학습실을 빌려 강의실로 사용했다. 1978년 12월 26일 연탄가스 중독으로 안타까운 생을 마감했다. 1982년 故 윤상원 열사 사망 후 2년이 지나, 故 윤상원 열사와 들불 야학의 동료 박기순 열사와의 영혼결혼식이 거행됐다. 이때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리었다.
광산구는 해마다 5월이면 윤상원 열사를 기리기 위한 추모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광산구청은 2020년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7층 대회의실을 ‘윤상원 홀’로 명명했다.
♣조비오 신부의 이름은 조철현(曺哲鉉, 1938~2016)으로 광산구 북산동 북성마을에서 태어났다. 본량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사범학교에 진학했으나 그만두고 1969년 사제서품을 받은 뒤 경동성당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세례명으로는 조비오 신부로 ‘오월 사제’로 널리 알려졌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 수습 위원으로 활동하며 광주시민의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해 앞장섰다. 계엄군의 무력 진압에 맞서 일명 ‘죽음의 행진’을 함께하고 구속되어 옥고를 치르기까지 했다. 5·18 진상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하기도 했다.
2008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로부터 국내에서 28번째, 광주대교구에서는 47년 만에 고위 성직자이자 교황의 명예 전속사제인 몬시뇰에 임명됐다. 2020년 민주화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에 추서되었다. 결핵 환우나 노약자, 걸인 등 불우한 사람들을 돌보던 ‘무등원’과 인연을 맺은 뒤 소화테레사 성녀의 영성을 살려낸다는 의미로 ‘소화자매원’으로 변경하고, 예수의 소화 수녀회를 창립했다.
4·19혁명은 이승만 정부의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기 위해 국민과 학생이 시위에 나서면서 또 다른 의로운 역사를 시작됐다. 광주에서는 광주고를 필두로 전남여고, 광주여고, 광주공고, 조대부고, 숭일고 학생들이 시위에 나서면서 시작됐다.
1994년 발행한 광산구지(光山區紙) 347쪽 기록에 광주 5·18 민주화운동 상황이 잘 기록돼 있다.
5.18 민주화운동은 윤상원 열사와 조비오 신부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윤상원 열사는 광산구 임곡동 출신이고 조비오 신부는 광산구 북산동 북성마을 출신이다. 수천 년 역사에 면면히 이어지는 광산 의병의 핏줄. 광산은 의병의 발원지로 충절의 고장으로 5.18 민주화운동까지 이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이 확대되고 정치인과 민주인사 학생들이 체포됐다. 5월 18일 일요일 오전 계엄군이 배치되고 대학은 폐쇄되고 공수특전단이 점령했다. 학생들이 학교로 모여들면서 200여 명의 학생이 투석전을 벌이고 휴교령을 해제하라 계엄 해제를 외쳤다. 계엄군의 진압이 점점 잔혹해지면서 학생들은 더욱 조직적으로 대항하고 더 많은 공수부대원이 투입됐다. 공수부대원에 대한 소문은 광주 전역에 불길처럼 번져 가면서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5월 21일 오전 금남로에는 십만이 넘는 시민이 모여들었다. 무장의 필요성을 느낀 청년들이 아세아 자동차공장에서 차량을 가져왔다. 오후 5시경 도청을 향하여 무장한 시민군 대오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5월 21일부터 5월 26일에 걸쳐 4차례 민주 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있었다. 5월 27일 새벽 0시를 기해 전화가 끊겼다. 새벽 4시쯤 도청 앞은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됐다. 계엄군은 방송을 통해 항복 권유의 최후통첩을 했다. 새벽 여명은 광주의 한을 안고 떠오르고 있었다.
광산구 출신으로 5·18 민주화운동에 나선 대표적인 인물로는 윤상원과 조비오 신부이다.
♣윤상원(尹祥源, 1950~1980) 열사는 1950년 8월 19일 천동마을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임곡초등학교, 광주북성중학교, 광주살레시오고등학교, 전남대 정치학과를 나온 뒤 주택은행 서울 관악구 봉천동 지점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1978년 교육지표 사건이 터지자 광주로 내려와 광천공단 제조업체에 취업해 직장생활을 하며 노동자들을 위한 들불 야학을 시작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1980년 5월 18일 시위에 참여, 5월 20일부터 당시 광천동 성당의 '들불 야학' 동료 강학들과 함께 '투사회보’를 제작해 총 13회에 걸쳐 배포했다.
이후 5월 23일 ‘수습 대책 위원회’를 중심으로 시민군의 무기를 반납하자는 주장에 반대했다. 5월 25일 항쟁 지도부인 「시민․학생 투쟁 위원회」를 결성을 주도하고 전남도청을 장악하고 항쟁 지도부의 대변인직을 맡았다.
광산 의병, 윤상원 열사·조비오 신부까지 이어져
북산동 출신 조비오 신부
‘오월 사제’ 광주시민 무고한 희생 막기 위해 앞장
계엄군 무력 진압 맞서 ‘죽음의 행진’ 구속 옥고
5·18 진상 규명 과정 계엄군 헬기 사격 증언하기도
윤상원 열사는 5월 26일, 외신기자와의 회견에서 “오늘 우리는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회견 이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전남도청에 대한 공격에 앞서 시민과 학생 등을 먼저 대피시킨 후, 새벽 4시경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30살의 일기로 사망했다. 정부는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2022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박기순(1957.11.7~1978.12.26.)은 보성군 출신이다. 그는 보성여중과 전남여고를 졸업하고, 1976년 전남대 역사교육과에 진학했다. 1978년 6월 27일, 전남대 교수들이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했다. 선언문에 서명한 교수 전원을 체포됐다. 7월 5일 박기순은 시위 주동하고 조선대 정문까지 진행됐다. 시위 참여자 500여 명이 연행되었으며, 이 중 14명이 구속됐다. 전남대 3학년생이던 박기순은 이 사건으로 인해 학교에서 제적됐다. 박기순은 아시아자동차 하도급 업체 동신강건사에 취업해 1978년, 들불 야학을 열었다.
미국의 노동자들에게도 들불이 등장한다. 1884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 방직공장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다가, 폭동죄로 체포되어 5명이 사형에 처했다. 노동자 오거스트 스파이즈는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 하지만 불꽃은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누구도 이 들불을 끌 수 없으리라!”라고 하였다.
조비오 신부 배려로 박기순은 광천동성당 교리 학습실을 빌려 강의실로 사용했다. 1978년 12월 26일 연탄가스 중독으로 안타까운 생을 마감했다. 1982년 故 윤상원 열사 사망 후 2년이 지나, 故 윤상원 열사와 들불 야학의 동료 박기순 열사와의 영혼결혼식이 거행됐다. 이때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리었다.
광산구는 해마다 5월이면 윤상원 열사를 기리기 위한 추모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광산구청은 2020년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7층 대회의실을 ‘윤상원 홀’로 명명했다.
♣조비오 신부의 이름은 조철현(曺哲鉉, 1938~2016)으로 광산구 북산동 북성마을에서 태어났다. 본량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사범학교에 진학했으나 그만두고 1969년 사제서품을 받은 뒤 경동성당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세례명으로는 조비오 신부로 ‘오월 사제’로 널리 알려졌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 수습 위원으로 활동하며 광주시민의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해 앞장섰다. 계엄군의 무력 진압에 맞서 일명 ‘죽음의 행진’을 함께하고 구속되어 옥고를 치르기까지 했다. 5·18 진상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하기도 했다.
2008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로부터 국내에서 28번째, 광주대교구에서는 47년 만에 고위 성직자이자 교황의 명예 전속사제인 몬시뇰에 임명됐다. 2020년 민주화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에 추서되었다. 결핵 환우나 노약자, 걸인 등 불우한 사람들을 돌보던 ‘무등원’과 인연을 맺은 뒤 소화테레사 성녀의 영성을 살려낸다는 의미로 ‘소화자매원’으로 변경하고, 예수의 소화 수녀회를 창립했다.
김강일 기자 gsjn@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