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등산에서 호남의병을 창의한 양산숙 의병장
입력 : 2022. 10. 12(수)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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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저널] 양산숙은 1561년(명종 18년) 나주(광산구) 박호 마을에서 송천 양응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유훈에 “과거를 통한 벼슬길에 나가지 말고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라” 하여 양산숙은 이를 대비하기위해 26살이 되던 해 가을, 고향인 나주(광산구) 박뫼 마을로 돌아와 의병을 모아 거의를 준비하고 꾸준히 전쟁을 대비해왔다.
양산숙의 나이 31세 되던 임진년(1592)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마자 연통을 통해 의병을 규합하여 5월 6일 의병을 창의한다.
안방준이 쓴 ‘국조인물고’에 “임진년에 회원(양산숙)이 날랜 병사 수백 명을 모았다”고 쓰고 있다.
양산숙(31)은 김천일(57)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장을 맡는다. 사돈인 송제민, 임환, 매형인 김광운, 조카인 김두남, 사돈인 유온, 유경지, 그리고 할아버지 조카들인 김인갑과 김의갑 등 가까운 인사들이 참여한다. 양산숙이 모은 300여 명은 명실상부한 호남연합군 형태를 띤 회맹군 수준이었다. 6월 3일에 수도 서울을 수복하고자 출정하였다.

* 행재소의 선조임금께 상소문을 올린 양산숙
김천일, 양산숙 의병군은 호남으로 밀고 내려오는 왜적을 소탕하며 그해 7월 강화도를 점령하고 의주와 서울로 가는 교통로를 확보하였다.
김천일은 상소문을 지어 양산숙에게 주어 임금의 피난처인 의주 행재소로 보낸다. 양산숙은 동문인 조헌의 제자 곽현(20세)을 데리고 장사꾼으로 변장하고 꼬박 달포나 걸려 8월 중순 의주에 당도해 행재소의 선조임금을 찾아가 상소문을 올렸다.
“김천일이 의병을 일으켜 전라 병사 최원과 같이 군사를 합하여 수원을 진격하였사오며 경상도에서 김호, 정인홍, 박성, 곽재우 등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무찌르고 있사옵니다.”
전국 최대 6천 의병과 함께 한양수복을 위해 북상 중인 고경명과 유팽로(4월 20일 창의), 안영, 양대박, 박광옥, 김경수 등 호남 의병의 창의를 보고하였다.
보고를 들은 선조는 김천일에게는 판결사로 올려 창의사라 부르게 하고 고경명을 초토사로 칭하게 하여 교서를 내렸다.
양산숙은 ‘흥복(興復)’이라는‘국토수복 계획’을 써 올리자 선조는 공조화랑 벼슬을 내리면서 “돌아가서 너의 장수에게 전하기를 마음과 힘을 다해 서울을 수복하여 나로 하여금 삼각산과 한강을 속히 볼 수 있도록 하라”하였다.
양산숙은 교지를 전달하여 왕명이 삼남에 통하게 하였다.

* 진주성에서 최후를 맞은 호남의병들
이듬해(1593) 6월 왜군이 진주성에 모여든다는 소식에 호남의병은 방어하기 위해 진주성으로 집결하였다. 김천일, 최경회, 양산숙, 고종후와 충청병사 황진, 김해 부사 이종인, 거제 현령 김준민, 사천 현감 장윤 등이 진주성 방어에 나선다. 진주성은 이미 10만 여명의 왜군으로 포위된 상태였다. 양산숙과 함께 동행 했던 홍함은“진주에 돌아가 봐야 죽는다”며 양산숙을 만류하고 나선다. 양산숙은 홀로 남강을 헤엄쳐 진주성에 들어갔다. 진주성의 군사와 백성들과 함께 9일 밤낮을 싸웠으나 마침내 6월 29일 퍼붓는 비속에 동문석벽이 무너지고 왜적은 물밀 듯이 쳐들어 왔다. 김천일 등 장수들은 남쪽 촉성루로 몰렸다. 최후의 시각이 임박해 오자 김천일은 아들 상건(象乾)을 품에 안고 남강에 뛰어들었다. 양산숙(32세)도 남강에 몸을 던진다. 최경회, 고종후 등과 함께 장열하게 순국하였다.
진주성 전투는 왜군들이 노리는 곡창지대, 호남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항쟁이었다.
양산숙은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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