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등산에서 산화한 다섯 의병장
입력 : 2022. 11. 24(목) 11:29
[광산저널] 어등산에서 순국한 김태원(준) 의병장(38)과 김율 의병장(27)에 이어서 1909년 1월 10일 어등산 전투에서 조경환 의병장과 의병 30명이 순국했다. 1909년 1월 하순 경 어등산 전투에서 김원범 의병장이 순국했다. 1909년 9월 26일 어등산 전투에서 양동환 의병장과 의병 10명이 순국했다.
?대천 조경환 의병장
광산군 서방면 신안리(북구 신안동)출신으로 면암 최익현의 문인이었다. 1907년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 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통분함을 금치 못해 12월 초. 화순, 광주, 함평, 영광, 장성에서 조경환은 김원오, 김동수, 양상기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함평에서 김태원과 함께 거병하여 좌익장으로 활약하였다. 이어서 김율 의병장의 선봉장이 되어 함평, 영광, 창평, 광산에서 맹활약을 하다 김태원 의병장이 순국하자 독립부대를 결성하여 반일투쟁 전개하였다.
1908년 6월 30일 전해산 의진과 분진하여 독립부대를 구성하여 호남창의대장이 되어 각 지역 향교에 수차례 격문을 발송하여 토왜(討倭)사상을 고취 시키고 맹활약을 폈다. 마지막 전투로 1909년 1월 10일 설날을 앞두고(음 1908. 12. 19.) 의병을 귀향시킨 후 막료 50명과 어등산 동쪽자락의 운수동 절골 어느 주막에서 밤을 지새고 아침에 행군하다 한당골에서 일본헌병대 산본 토벌대의 기습을 받고 2시간 교전 끝에 30명이 전사하고 10명이 피체되었다. 조경환 의병장은 왼쪽 가슴에 두 발의 적탄을 맞았다. 품 안에 간직한 의병 명단을 모두 불사른 뒤에야 숨을 거두었다. 일본 헌병대 기록에 의하면 이때 일,군경이 사용된 총알이 996발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치열한 대격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하늘이 거듭 푸르고 달빛도 다시 밝으리라
귀신이 되어 왜적을 섬멸한다.
섬나라 왜놈 멸망하지 않으면
죽어 혼백이라도 되돌아오지 않겠다.
김원범(金元範, 1886~1909)의병장
광주군 당부면 북촌 출신으로 1906년 무등산에서 형 김원국과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김태원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장성 등지에서 활약하면서 의병 3백여 명을 이끌고 일 군경 광주수비대와 수차례 교전하면서 일본군 40여 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7월, 호남 의병 대장인 전해산 의병부대의 중군장으로서 영광 불갑산, 장성 동화, 담양 한재, 함평 월야 등 여러 지역에서 활약하였다. 이때 형 원국이 조경환과 상봉한 후 선봉장이 되자 그는 도포장이 되었다. 1909년 1월 조경환이 전사하자 다시 전해산과 합세하여 대동창의단(大同倡義團)을 조직하고 중군장을 맡았다. 그 후 원국과 광주, 나주, 담양, 장성 등지에서 함께 활약하였다. 1909년 2월 어등산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되어 광주수비대에서 취조를 받다가 스스로 자결하였다.
‘아~ 슬프도다
우리 강토 되찾아 튼튼한 기반을 다져
조선에서 태어났다가 조선에서 죽었으니
위대한 이 충절일세.
내 님께 다 했으니 이는 영광된 죽음일세.‘
양동환(1864- ? 45세) 의병장- 서울 사람(출신지는 불분명).
나주, 광주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1908년 이후 이기손 의병부대 중군장으로 활동하였다. 이기손 의병장이 잠적한 후에 독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경찰이 기록한 전남폭도사 139쪽
1909년 9월 26일 오전 10시 임곡파견소 헌병 2명과 보조원 5명이 어등산에서 수괴 양동환이 이끄는 비도 80명과 충돌, 10명을 죽이고 화승총 8, 군도 1을 노획했다.어등산에서 순국한 양동환 의병장의 기록 등을 찾아볼 수 없어 아쉽다.
?대천 조경환 의병장
광산군 서방면 신안리(북구 신안동)출신으로 면암 최익현의 문인이었다. 1907년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 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통분함을 금치 못해 12월 초. 화순, 광주, 함평, 영광, 장성에서 조경환은 김원오, 김동수, 양상기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함평에서 김태원과 함께 거병하여 좌익장으로 활약하였다. 이어서 김율 의병장의 선봉장이 되어 함평, 영광, 창평, 광산에서 맹활약을 하다 김태원 의병장이 순국하자 독립부대를 결성하여 반일투쟁 전개하였다.
1908년 6월 30일 전해산 의진과 분진하여 독립부대를 구성하여 호남창의대장이 되어 각 지역 향교에 수차례 격문을 발송하여 토왜(討倭)사상을 고취 시키고 맹활약을 폈다. 마지막 전투로 1909년 1월 10일 설날을 앞두고(음 1908. 12. 19.) 의병을 귀향시킨 후 막료 50명과 어등산 동쪽자락의 운수동 절골 어느 주막에서 밤을 지새고 아침에 행군하다 한당골에서 일본헌병대 산본 토벌대의 기습을 받고 2시간 교전 끝에 30명이 전사하고 10명이 피체되었다. 조경환 의병장은 왼쪽 가슴에 두 발의 적탄을 맞았다. 품 안에 간직한 의병 명단을 모두 불사른 뒤에야 숨을 거두었다. 일본 헌병대 기록에 의하면 이때 일,군경이 사용된 총알이 996발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치열한 대격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하늘이 거듭 푸르고 달빛도 다시 밝으리라
귀신이 되어 왜적을 섬멸한다.
섬나라 왜놈 멸망하지 않으면
죽어 혼백이라도 되돌아오지 않겠다.
김원범(金元範, 1886~1909)의병장
광주군 당부면 북촌 출신으로 1906년 무등산에서 형 김원국과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김태원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장성 등지에서 활약하면서 의병 3백여 명을 이끌고 일 군경 광주수비대와 수차례 교전하면서 일본군 40여 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7월, 호남 의병 대장인 전해산 의병부대의 중군장으로서 영광 불갑산, 장성 동화, 담양 한재, 함평 월야 등 여러 지역에서 활약하였다. 이때 형 원국이 조경환과 상봉한 후 선봉장이 되자 그는 도포장이 되었다. 1909년 1월 조경환이 전사하자 다시 전해산과 합세하여 대동창의단(大同倡義團)을 조직하고 중군장을 맡았다. 그 후 원국과 광주, 나주, 담양, 장성 등지에서 함께 활약하였다. 1909년 2월 어등산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되어 광주수비대에서 취조를 받다가 스스로 자결하였다.
‘아~ 슬프도다
우리 강토 되찾아 튼튼한 기반을 다져
조선에서 태어났다가 조선에서 죽었으니
위대한 이 충절일세.
내 님께 다 했으니 이는 영광된 죽음일세.‘
양동환(1864- ? 45세) 의병장- 서울 사람(출신지는 불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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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광주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1908년 이후 이기손 의병부대 중군장으로 활동하였다. 이기손 의병장이 잠적한 후에 독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경찰이 기록한 전남폭도사 139쪽
1909년 9월 26일 오전 10시 임곡파견소 헌병 2명과 보조원 5명이 어등산에서 수괴 양동환이 이끄는 비도 80명과 충돌, 10명을 죽이고 화승총 8, 군도 1을 노획했다.어등산에서 순국한 양동환 의병장의 기록 등을 찾아볼 수 없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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