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구 본량면 출신 금제錦齊 이기손 의병장
입력 : 2022. 12. 28(수) 09:45

[광산저널] 금제錦齊 이기손(1879- 1957) 의병장은 광산구 본량면 북산동 장등마을에서 태어났다. 도림사에서 대학자였던 후석 오준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7(30)년 늦가을 평소 학문을 함께 했던 전해산, 김태원 등과 의병 봉기를 모의하였다.
이기손은 1908년 1월 광산, 나주, 함평. 무안 일대에 의병 800명을 모집하여 상대장에 이기손, 선봉장 박일동, 엄석운. 중군장 양동환, 호군장 김선원, 우익장 정만선, 죄익장 조만길, 포대장 김봉선, 서기 이재훈으로 조직하고 무기는 포대장 김봉선의 주도로 500정을 모았다고 한다. 군량 조달은 본량에 사는 문장환을 비롯하여 유지들로부터 지원받았다.
1월 대보름날이 지나고 하순 아침에 아내와 두 아들딸을 모아 놓고
“지금 우리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잔불이나 다름없어
이 한 몸은 이미 가정에만 묶여 있을 몸이 아니외다.
3남매를 잘 부탁하오.”⌟
용진산으로 들어가 3일이 지나 왜병이 산을 향해 파고들었다. 이기손 의병 부대는 매복했다가 격전 끝에 왜병을 사살하고 조총 1백 정을 노획했다. 다음날 왜병은 병력을 증강해 공격해왔다. 이번에도 크게 전과를 올렸다. 이기손 의병장은 의진을 삼도면 석문산으로 옮겼다.
다음날 장성 기삼연 부대로부터 지원요청이 와 이기손은 의병 3백여 명을 이끌고 담양 창평으로 가서 김태원과 만나 작전을 협의하고 요시다(吉田勝三郎) 부대를 공격하기로 하고 이튿날 1908년 음력 정월 설날 새벽 무동촌을 기습하여 요시다 소좌를 사살하고 그 부하 5~6명도 사살했다.
이기손 부대가 삼도 석문산으로 회군하는 길에 삼도면 세동 부락에 들려 군량미와 군자금을 마련했다. 며칠 후 왜경 7~8명이 군량미를 내줬다는 이유로 주민 오문현 등 10여 명을 잡아갔다는 연락을 받은 이기손은 군사를 이끌고 뒤 쫒아갔다. 왜경들은 체포해 가던 부락민들을 놓아주고 그냥 도주해 버렸다.
이기손은 의진을 함평 나산 유덕산(裕德山)으로 옮겼다. 전해산 의병 부대와 연합하여 ‘호남동의단’의 제7진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이기손의 의병 수는 당초 7백 명이었으나 1년 반이 지나는 동안 크게 줄었다.
1909년 9월 일제의 ⌜남한폭도대토벌작전⌟으로 호남 의병은 모두 죽고 체포되었다는 상황을 맞아 이기손은 ⌜해병시유감(解兵詩有感)⌟글을 남기고 군대를 해산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을 만나 “나는 왜적에게 쫒기는 몸이다. 이제 집을 나가면 살아 돌아오기 기약이 없다.” 말하고 이튿날 새벽 선산에 성묘를 올리고, 삼도면 도림리로 숨어 들어가 전투 중에 쓴 난중일기 2권을 처족인 오필선에게 맡겼다. 그 후 만주(간도)를 거쳐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가 귀국하였다.
1915년 전북 금산 대둔산에 은거하며 후학 양성에 주력했다.
1940년 봄(63) 고종과 순종(융희황제)를 위한 어필각(御筆閣)과 숭봉전(崇奉殿)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진력하였다. 1957년 11월 27일(음) 80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이기손 의병장 충혼탑이 송정공원에 세워져 있다.
이기손은 1908년 1월 광산, 나주, 함평. 무안 일대에 의병 800명을 모집하여 상대장에 이기손, 선봉장 박일동, 엄석운. 중군장 양동환, 호군장 김선원, 우익장 정만선, 죄익장 조만길, 포대장 김봉선, 서기 이재훈으로 조직하고 무기는 포대장 김봉선의 주도로 500정을 모았다고 한다. 군량 조달은 본량에 사는 문장환을 비롯하여 유지들로부터 지원받았다.
1월 대보름날이 지나고 하순 아침에 아내와 두 아들딸을 모아 놓고
“지금 우리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잔불이나 다름없어
이 한 몸은 이미 가정에만 묶여 있을 몸이 아니외다.
3남매를 잘 부탁하오.”⌟
용진산으로 들어가 3일이 지나 왜병이 산을 향해 파고들었다. 이기손 의병 부대는 매복했다가 격전 끝에 왜병을 사살하고 조총 1백 정을 노획했다. 다음날 왜병은 병력을 증강해 공격해왔다. 이번에도 크게 전과를 올렸다. 이기손 의병장은 의진을 삼도면 석문산으로 옮겼다.
다음날 장성 기삼연 부대로부터 지원요청이 와 이기손은 의병 3백여 명을 이끌고 담양 창평으로 가서 김태원과 만나 작전을 협의하고 요시다(吉田勝三郎) 부대를 공격하기로 하고 이튿날 1908년 음력 정월 설날 새벽 무동촌을 기습하여 요시다 소좌를 사살하고 그 부하 5~6명도 사살했다.
이기손 부대가 삼도 석문산으로 회군하는 길에 삼도면 세동 부락에 들려 군량미와 군자금을 마련했다. 며칠 후 왜경 7~8명이 군량미를 내줬다는 이유로 주민 오문현 등 10여 명을 잡아갔다는 연락을 받은 이기손은 군사를 이끌고 뒤 쫒아갔다. 왜경들은 체포해 가던 부락민들을 놓아주고 그냥 도주해 버렸다.
이기손은 의진을 함평 나산 유덕산(裕德山)으로 옮겼다. 전해산 의병 부대와 연합하여 ‘호남동의단’의 제7진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이기손의 의병 수는 당초 7백 명이었으나 1년 반이 지나는 동안 크게 줄었다.
1909년 9월 일제의 ⌜남한폭도대토벌작전⌟으로 호남 의병은 모두 죽고 체포되었다는 상황을 맞아 이기손은 ⌜해병시유감(解兵詩有感)⌟글을 남기고 군대를 해산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을 만나 “나는 왜적에게 쫒기는 몸이다. 이제 집을 나가면 살아 돌아오기 기약이 없다.” 말하고 이튿날 새벽 선산에 성묘를 올리고, 삼도면 도림리로 숨어 들어가 전투 중에 쓴 난중일기 2권을 처족인 오필선에게 맡겼다. 그 후 만주(간도)를 거쳐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가 귀국하였다.
1915년 전북 금산 대둔산에 은거하며 후학 양성에 주력했다.
1940년 봄(63) 고종과 순종(융희황제)를 위한 어필각(御筆閣)과 숭봉전(崇奉殿)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진력하였다. 1957년 11월 27일(음) 80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이기손 의병장 충혼탑이 송정공원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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