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진정사 후석 오준선· 의제 오상열
일제탄압…용진산 중턱 용진정사 짓고 후학 양성
문하생 수백명 이기손·오성술 등 많은 유생 배출
최익현 의병 봉기 창의군 용진정사 드나들면 모의
입력 : 2023. 01. 18(수)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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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저널] 광산구 삼도면 도림 마을에서 태어나 18세 때 노사 기정진 문하의 한 말 대표 유학자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나주성이 동학군에 점령당했을 때 향반의 수장으로 나주 목사 민종열과 같이 나주성을 사수하였고,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비분강개하여 자신의 집에 은거하던 중 양반을 회유하기 위해 내린 일본 천황의 은사금을 거절하여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많은 고초를 당하였으나 시종일관 굴하지 않았다.
오준선은 석문산에서 5년간 제자를 양성하다가 나라가 망하고 일제의 탄압이 가중됨에 용진산 중턱에 용진정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여 그의 문하생이 632명이나 되었다. 그중 뜻있는 이기손, 오성술 등 많은 유생들이 의병에 참여하였고. 초창기 면암 최익현의 의병 봉기에 호응한 의병 창의군 들이 용진정사을 드나들며 모의하였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문하생들과 용진정사 앞 큰 바위에서 통곡하고 서울 고종장례행사에 참여 후 그 큰 바위를 ‘읍궁암(泣弓岩)’이라 불렀다.
“원수를 갚기 전에는 상복을 벗을 수 없다”하여 백립을 쓰고 다녔다.
오준선은 용진정사에서 ⌜의병전⌟을 저술하여 고광순, 기삼연, 김준, 전해산(전수용) 의병장의 활약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1934년 그의 학문적 체계를 정리한 ⌜후석유고(25권 12책)집⌟이 간행되었다.
오준선의 생가에 유림들의 발의로 ⌜도림사⌟를 건립하여 노사 기정진과 난와 오계수, 후석 오준선의 학덕과 유풍을 기리고 추모하고 있다.

4 의제 오상열(吳相烈 1879- 1908) 의병장.

1879년(고종17) 광산구 명도동(본량) 대명동에서 태어났다.
1906년 10월, 28세에 의병전에 뛰어들어 의병장 기삼연, 김준, 오성술에게 인정받아 도통장으로 추대되어 어등산 전투에 참가하였다.
부인 배씨에게 글을 남겼다.

吾生未可必 나의 생은 가히 기약할 수 없다
須護腹中兒 뱃속에 아이를 잘 보호하시오.
不恨死當死 죽임에 임하여 죽는 것은 한이 없지만
親年六十餘 어버이 예순이 넘으시니 그것이 마음에 걸리네.

1907년 본량면 대명동천 영사재에서 무기를 개조하고 탄약을 만들면서 함평, 나주, 광주, 담양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908년 2월 양진여 의병부대와 연합으로 담양, 창평, 무동촌에서 왜장 요시다(吉田)소좌를 비롯한 적을 섬멸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때 소총, 장검, 망원경 등 신무기를 노획하여 전시도 하였다.
그 후 김태원, 김율 의병장이 순절하자 전세가 불리하게 되어 오상렬은 잔병을 수습하여 전해산 의병부대와 합세, 본량면 석문산 전투에서 적을 격파하고 전해산 부대와 헤어져 음력 12월 오상렬 부대는 용진산 사호치 전투에서 일주 야를 혈전하다 오상열 의병장은 적의 흉탄에 맞아 1908년 12월 23일 망국의 통한을 안은 채 30세에 순국하였다.

다음 해, 일본 군경의 의병 가족에 대한 박해가 가중되어 부인 배씨는 폭행과 도검에 찔리고 어린 아들 정교는 화상을 입고 60세 노부는 장님으로 피신하여 살다가 배씨는 매 맞은 여독으로 부종을 앓다가 40살에 한 맺힌 이승을 떴다.

**오상렬, 오성술 순절 기적비가 광산구 명도동 137- 7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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