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장가 눌재訥齋 박상 (1474- 1530)
절조와 의리의 선비, 백성 위한 목민관으로 청백리(淸自吏)
‘매월당문집' 간행 기초 마련, 도정절문집 ‘동국사략' 편찬
‘매월당문집' 간행 기초 마련, 도정절문집 ‘동국사략' 편찬
입력 : 2023. 04. 13(목) 07:21

[광산저널] 박상은 영의정 박 순의 큰아버지다. 절조와 의리의 선비, 백성을 위한 목민관으로 청백리(淸白吏)다. 호남 시단의 첫머리에 박상이 자리하고 있다. 박상은 무등산 가사 문학의 중심인 면앙 송순과 호남의 시종 석천 임억령, 조계 정만종을 가르친 스승이다. 고봉 기대승과 제봉 고경명 등도 박상의 문하라고 할 수 있다. 박상은 1,200여 수의 방대한 시를 남긴 대 문장가이다.
눌재 박상은 과거 광주시로 편입하기 전 광산군 시절 서창동 절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1496년(연산군 2) 23세 진사(생원시)에 합격하고 1501년 28세 식년문과 정시 을과에 급제하여 1505년 전라 도사, 1506년 중종 초기 사간원 헌납이 되어 임금의 종친 중용에 반대하다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었다가 풀려나 한산 군수로 좌천되었다.
임피현령(臨波縣令) 3년 임기가 끝나자 부모 봉양을 위해 사직하고 광산으로 돌아와 석천 임억령의 수학을 수락하여 후학을 지도하였다.
◈ 폐비 신씨(단경왕후) 복위 사건
1515년 박상(42)은 순창군수 김 정과 무안 현감 유 옥과 함께 단경왕후 폐비 신씨(端敬王后愼氏) 복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고 또 임금을 협박해 국모를 내쫓은 박원종(朴元宗) 등 3 훈신(勳臣)의 죄를 바로잡기를 청하다가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오림 역(烏林驛 남평)으로 유배되었다.
1516년 방면되어 순천부사가 되었으나 그해 겨울 어머니의 상(喪)으로 사직하였다. 1521년 상 주와 충주목사를 지내고 1526년 문과 중시에 장원하고 이듬해 작은 죄목으로 나주 목사로 좌천되어 1529년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옳지 못한 일에 대하여 일절 타협을 거부했다. 강직하고 불의를 참지 못해 훈구대신은 물론 임금까지도 껄끄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문에 뛰어나 정조는 박상의 시에 대해 ‘청아고고하고 담박하여 저절로 한없이 맛이 있다' ‘그 고아하고 강건한 것은 후인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극찬했다
당대 뛰어난 시인 권필, 이안눌, 박은, 최립 등의 장점을 다 갖춘 최고의 시인이라 칭송하였다. 1688년 (숙종 14년) 이조판서 추증되었다
◈ 우부리 사건과 고양이
연산군은 팔도에 채홍사를 파견하여 미녀를 구하는데 나주 골에 김의(우부리)라는 관노의 딸이 뽑혀 궁으로 들어가 연산군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우부리는 제 세상을 만난 듯 온갖 악행을 저질러 원성이 자자했다.
나주 목사로 내려간 박상은 우부리를 나주 금성관으로 불러들여 국법을 유린하였다 하여 법대 로 엄하게 다스려 마침내 매를 때려 죽게(장살) 만들었다.
연산군이 대노하여 박상에게 사약을 내렸다.
박상은 우부리의 죄상을 알리려 한양 길에 오른다. 장성 입암산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다. 난데없이 고양이가 나타나 박상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잡아채는 것이 아닌가. 박상은 고양이를 따라 큰길에서 벗어나 산길로 끌려갔다. 그 잠시 비켜선 순간에 사약을 든 금부도사가 말 타고 지나가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열흘 후 중종반정이 일어났고, 박상은 결국 화를 면했다.
박상은 고양이를 따라 정양사(백양사)로 가게 되었다. 벼슬을 그만두고 고양이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의 전답 중 일부를 고양이를 위해 묘답으로 정양사에 주었다는 이야기다.
눌재 박상은 김시습의 ‘매월당 문집’ 간행 기초를 마련했고 ‘도정절문집’ 발간,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 말까지의 통사를 간추린 ‘동국사략’을 편찬했다.
눌재 박상은 과거 광주시로 편입하기 전 광산군 시절 서창동 절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1496년(연산군 2) 23세 진사(생원시)에 합격하고 1501년 28세 식년문과 정시 을과에 급제하여 1505년 전라 도사, 1506년 중종 초기 사간원 헌납이 되어 임금의 종친 중용에 반대하다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었다가 풀려나 한산 군수로 좌천되었다.
임피현령(臨波縣令) 3년 임기가 끝나자 부모 봉양을 위해 사직하고 광산으로 돌아와 석천 임억령의 수학을 수락하여 후학을 지도하였다.
◈ 폐비 신씨(단경왕후) 복위 사건
1515년 박상(42)은 순창군수 김 정과 무안 현감 유 옥과 함께 단경왕후 폐비 신씨(端敬王后愼氏) 복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고 또 임금을 협박해 국모를 내쫓은 박원종(朴元宗) 등 3 훈신(勳臣)의 죄를 바로잡기를 청하다가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오림 역(烏林驛 남평)으로 유배되었다.
1516년 방면되어 순천부사가 되었으나 그해 겨울 어머니의 상(喪)으로 사직하였다. 1521년 상 주와 충주목사를 지내고 1526년 문과 중시에 장원하고 이듬해 작은 죄목으로 나주 목사로 좌천되어 1529년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옳지 못한 일에 대하여 일절 타협을 거부했다. 강직하고 불의를 참지 못해 훈구대신은 물론 임금까지도 껄끄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문에 뛰어나 정조는 박상의 시에 대해 ‘청아고고하고 담박하여 저절로 한없이 맛이 있다' ‘그 고아하고 강건한 것은 후인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극찬했다
당대 뛰어난 시인 권필, 이안눌, 박은, 최립 등의 장점을 다 갖춘 최고의 시인이라 칭송하였다. 1688년 (숙종 14년) 이조판서 추증되었다
◈ 우부리 사건과 고양이
연산군은 팔도에 채홍사를 파견하여 미녀를 구하는데 나주 골에 김의(우부리)라는 관노의 딸이 뽑혀 궁으로 들어가 연산군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우부리는 제 세상을 만난 듯 온갖 악행을 저질러 원성이 자자했다.
나주 목사로 내려간 박상은 우부리를 나주 금성관으로 불러들여 국법을 유린하였다 하여 법대 로 엄하게 다스려 마침내 매를 때려 죽게(장살) 만들었다.
연산군이 대노하여 박상에게 사약을 내렸다.
박상은 우부리의 죄상을 알리려 한양 길에 오른다. 장성 입암산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다. 난데없이 고양이가 나타나 박상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잡아채는 것이 아닌가. 박상은 고양이를 따라 큰길에서 벗어나 산길로 끌려갔다. 그 잠시 비켜선 순간에 사약을 든 금부도사가 말 타고 지나가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열흘 후 중종반정이 일어났고, 박상은 결국 화를 면했다.
박상은 고양이를 따라 정양사(백양사)로 가게 되었다. 벼슬을 그만두고 고양이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의 전답 중 일부를 고양이를 위해 묘답으로 정양사에 주었다는 이야기다.
눌재 박상은 김시습의 ‘매월당 문집’ 간행 기초를 마련했고 ‘도정절문집’ 발간,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 말까지의 통사를 간추린 ‘동국사략’을 편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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