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사성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입력 : 2023. 04. 23(일) 15:30

[광산저널] ∎조선 최고의 ‘사상로맨스’
기대승은 32세(명종13년(1558년) 10월 28일 과거시험에 을과 장원급제하고
10월 31일 상경하여 대사성 퇴게 이황(58)을 찾아가 문안드리고 이황의 학문적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다. 참으로 당돌한 일이었다.
이황(58세)은 26살 아래인 신출내기 기대승의 의견을 기꺼이 받아 준다.
11월 1일 이황이 기대승에게 서신을 보낸다.
“어제 찾아줘서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내일 남행은 결정적인가?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이 하여 대업을 이루기 바란다.”
기대승은 답서에 천명도의 사단(인의예지) 칠정(희노애락애오욕)에 대한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이기일원론’을 주장한다.
이것을 시작으로 12년에 걸쳐 114통의 서한을 교환하였는데 그 가운데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조선 성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상논쟁으로 유학사상 최고봉이었다.
이 사상논쟁에서 기대승의 마지막 물음에 이황은 답을 하지 않았다.
안동 도산서원 해설자는 그 당시 기대승이 나이는 어렸지만, 학문적으로 더 깊었었다고 말한다.
이황은 기대승을 동지로 대우하고 기대승은 이황을 스승으로, 또는 아버지로 예우하였다.
⩽선조실록 3권⩾에 보면
선조 임금이 낙향하는 이황에게
“학문하는 사람 중에 아뢸만한 자가 있지 않는가? 묻자,
이황은 ”학자 중에 기대승이 문자를 많이 보았고 이학(理學)에도 조예가 가장 높으니 통유(通儒)입니다. 이러한 유자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임금은 “이 말이 지당하다, 평상시 그가 문장을 잘 짓는다고 여겼다.”
∎퇴계 이황의 묘비문을 짓다
이황 나이 69세 되던 봄에 고향으로 돌아와 자기 아버지 찬성공의 묘비문과 자기 묘비문 작성을 기대승에게 부탁하고 12월에 별세한다.
기대승은 이황의 부음을 접하고 통곡하면서 제문을 썼다.
“아 슬프다, 대들보가 꺾기고 태산이 무너졌으니,
제가 어떻게 가누겠는가,
위로는 사문이 땅에 떨어진 것이 슬프고,
아래로는 만학이 의지할 곳을 잃었음이 슬프니,
어떻게 하면 나로 하여금 뼈가 무너지고
혼이 날아가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탄식했다.
기대승 나이 45세 되던 해 2월에 이황 부친과 이황의 묘비문을 썼다.
이황이 떠난 지 1년 후 선조 4년(1572) 2월에 고봉(46)운 성균간 대사성이 되었고 이어 대사간을 지내다가 병으로 10월에 사직하고 귀향하다 전북 고부(古阜)에 사는 사돈 김 점의 집에서 운명했다.
기대승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 고경명(高敬命), ․최경회(崔慶會)․ 최시망(崔時望) 등이 있다.
∎서원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야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서원문화에서 찾아야 한다는 학자들이 서원 르네상스 시대를 표방하기 위해 안동 도산서원과 광산의 월봉서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현실화하기를 바란다.
기대승은 32세(명종13년(1558년) 10월 28일 과거시험에 을과 장원급제하고
10월 31일 상경하여 대사성 퇴게 이황(58)을 찾아가 문안드리고 이황의 학문적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다. 참으로 당돌한 일이었다.
이황(58세)은 26살 아래인 신출내기 기대승의 의견을 기꺼이 받아 준다.
11월 1일 이황이 기대승에게 서신을 보낸다.
“어제 찾아줘서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내일 남행은 결정적인가?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이 하여 대업을 이루기 바란다.”
기대승은 답서에 천명도의 사단(인의예지) 칠정(희노애락애오욕)에 대한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이기일원론’을 주장한다.
이것을 시작으로 12년에 걸쳐 114통의 서한을 교환하였는데 그 가운데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조선 성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상논쟁으로 유학사상 최고봉이었다.
이 사상논쟁에서 기대승의 마지막 물음에 이황은 답을 하지 않았다.
안동 도산서원 해설자는 그 당시 기대승이 나이는 어렸지만, 학문적으로 더 깊었었다고 말한다.
이황은 기대승을 동지로 대우하고 기대승은 이황을 스승으로, 또는 아버지로 예우하였다.
⩽선조실록 3권⩾에 보면
선조 임금이 낙향하는 이황에게
“학문하는 사람 중에 아뢸만한 자가 있지 않는가? 묻자,
이황은 ”학자 중에 기대승이 문자를 많이 보았고 이학(理學)에도 조예가 가장 높으니 통유(通儒)입니다. 이러한 유자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임금은 “이 말이 지당하다, 평상시 그가 문장을 잘 짓는다고 여겼다.”
∎퇴계 이황의 묘비문을 짓다
이황 나이 69세 되던 봄에 고향으로 돌아와 자기 아버지 찬성공의 묘비문과 자기 묘비문 작성을 기대승에게 부탁하고 12월에 별세한다.
기대승은 이황의 부음을 접하고 통곡하면서 제문을 썼다.
“아 슬프다, 대들보가 꺾기고 태산이 무너졌으니,
제가 어떻게 가누겠는가,
위로는 사문이 땅에 떨어진 것이 슬프고,
아래로는 만학이 의지할 곳을 잃었음이 슬프니,
어떻게 하면 나로 하여금 뼈가 무너지고
혼이 날아가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탄식했다.
기대승 나이 45세 되던 해 2월에 이황 부친과 이황의 묘비문을 썼다.
이황이 떠난 지 1년 후 선조 4년(1572) 2월에 고봉(46)운 성균간 대사성이 되었고 이어 대사간을 지내다가 병으로 10월에 사직하고 귀향하다 전북 고부(古阜)에 사는 사돈 김 점의 집에서 운명했다.
기대승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 고경명(高敬命), ․최경회(崔慶會)․ 최시망(崔時望) 등이 있다.
∎서원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야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서원문화에서 찾아야 한다는 학자들이 서원 르네상스 시대를 표방하기 위해 안동 도산서원과 광산의 월봉서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현실화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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