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수채화가 배동신 ②
화골(畵骨)을 그렸던 천재 기인(奇人)
입력 : 2023. 11. 22(수) 20:40

[광산저널] ∎배동신 사랑에 빠진다.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배동신의 그림에 빠져버린 가와바타 미술학교 교수의 딸 와타나베 마사에와 사랑에 빠진다. 같은 미술학도였던 그녀의 눈에 보이는 배동신작품은 완벽했다. 선과 색이 하나 된 미술세계에 반해버린 것이다. 기교도 드러나지 않고 선도 꾸밈이 없으면서도 모든 움직임을 포착하고 있는 그림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함께 살기 시작하여 첫아들 ‘용‘이가 태어나고 둘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며칠을 대문간에서 서성였으나 거절당했다.
배동신은 이 고난과 좌절의 시기에 중요한 기법 발견을 발견하게 된다. 그 무렵 유럽에서 유행하던 수채화 새로운 기법이 들어왔다. 수채화의 물맛과 자연스런 번짐에서 영혼의 번짐, 수채화 순수기법을 터득하기에 이른다. 배동신은 구상과 추상의 이중성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조화시킨 독창적인 수채화세계를 확립했다.
그림을 그리면서 물감이 물에 번지는 효과를 살리고 마르지 않는 상태에서 다른 색을 입히는 번짐을 통해 자연스러움을 담고자 했다. 강하면서도 투명하게, 부드러우면서도 무겁게, 소박하면서도 진실된, 꾸밈없는 시선으로 자신만의 작품을 완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배동신 일본에서 돌아오다.
1944년 일본이 전쟁에서 패전하자 부모님의 결혼 반대와 전쟁의 폭격을 피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어렵게 배표를 구해 일본인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배에 숨어 한국으로 나왔다. 갈 곳이 없던 그는 나주 금천에서 과수원을 하던 형의 집에 머물며 살림을 차렸다. 그의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금정산, 눈앞에 펼쳐진 남도의 산하가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다시 찾아온 조국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수채화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은 물론 작가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대우조차 받지 못했다. 삶의 터전 또한 있을 리 없었다. 부양해야할 아내와 두 아들이 있었지만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했다. 그림은 무엇과는 바꿀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이었다. 생활이 척박할수록 남도의 산하는 더욱 그의 가슴속에 들어왔다. 당시 광주전남화단은 20명이 넘는 일본유학파의 활동으로 활발한 양상을 보였다.
∎ 광주 전남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다.
“저 깊고 푸르게 우렁우렁 울어대는 무등산의 울음소리를 사고 팔 수 있느냐!
1946년 10월 광주도서관에서 첫 개인전 개최하였다. 해방 후 광주, 전남에서는 최초의 개인전을 열어 화제를 모았다. 기름기가 제거된 맑은 수채화만이 남도를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화려한 평가와는 달리 전시회의 반응은 참혹했다.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수채화도 그림이냐? 는 것이었다. 심지어 ”저렇게 묽은 물감으로 죽죽 그어대는 것이 그림이냐? 애들 장난이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배동신은 기죽지 않았다.
“이놈들아 그림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이냐? 너희들은 잠깐 피었다 스러지는 저 아름다운 노을을 사고 팔수 있느냐!” “자연이란, 아름다움이란, 풍광의 영혼이란, 개인의 소유가 아닌데도 어떻게 사고 팔 수 있다는 말이냐!”라고 호통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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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배동신의 그림에 빠져버린 가와바타 미술학교 교수의 딸 와타나베 마사에와 사랑에 빠진다. 같은 미술학도였던 그녀의 눈에 보이는 배동신작품은 완벽했다. 선과 색이 하나 된 미술세계에 반해버린 것이다. 기교도 드러나지 않고 선도 꾸밈이 없으면서도 모든 움직임을 포착하고 있는 그림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함께 살기 시작하여 첫아들 ‘용‘이가 태어나고 둘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며칠을 대문간에서 서성였으나 거절당했다.
배동신은 이 고난과 좌절의 시기에 중요한 기법 발견을 발견하게 된다. 그 무렵 유럽에서 유행하던 수채화 새로운 기법이 들어왔다. 수채화의 물맛과 자연스런 번짐에서 영혼의 번짐, 수채화 순수기법을 터득하기에 이른다. 배동신은 구상과 추상의 이중성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조화시킨 독창적인 수채화세계를 확립했다.
그림을 그리면서 물감이 물에 번지는 효과를 살리고 마르지 않는 상태에서 다른 색을 입히는 번짐을 통해 자연스러움을 담고자 했다. 강하면서도 투명하게, 부드러우면서도 무겁게, 소박하면서도 진실된, 꾸밈없는 시선으로 자신만의 작품을 완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배동신 일본에서 돌아오다.
1944년 일본이 전쟁에서 패전하자 부모님의 결혼 반대와 전쟁의 폭격을 피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어렵게 배표를 구해 일본인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배에 숨어 한국으로 나왔다. 갈 곳이 없던 그는 나주 금천에서 과수원을 하던 형의 집에 머물며 살림을 차렸다. 그의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금정산, 눈앞에 펼쳐진 남도의 산하가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다시 찾아온 조국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수채화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은 물론 작가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대우조차 받지 못했다. 삶의 터전 또한 있을 리 없었다. 부양해야할 아내와 두 아들이 있었지만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했다. 그림은 무엇과는 바꿀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이었다. 생활이 척박할수록 남도의 산하는 더욱 그의 가슴속에 들어왔다. 당시 광주전남화단은 20명이 넘는 일본유학파의 활동으로 활발한 양상을 보였다.
∎ 광주 전남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다.
“저 깊고 푸르게 우렁우렁 울어대는 무등산의 울음소리를 사고 팔 수 있느냐!
1946년 10월 광주도서관에서 첫 개인전 개최하였다. 해방 후 광주, 전남에서는 최초의 개인전을 열어 화제를 모았다. 기름기가 제거된 맑은 수채화만이 남도를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화려한 평가와는 달리 전시회의 반응은 참혹했다.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수채화도 그림이냐? 는 것이었다. 심지어 ”저렇게 묽은 물감으로 죽죽 그어대는 것이 그림이냐? 애들 장난이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배동신은 기죽지 않았다.
“이놈들아 그림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이냐? 너희들은 잠깐 피었다 스러지는 저 아름다운 노을을 사고 팔수 있느냐!” “자연이란, 아름다움이란, 풍광의 영혼이란, 개인의 소유가 아닌데도 어떻게 사고 팔 수 있다는 말이냐!”라고 호통을 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