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수채화가 배동신 ③
입력 : 2023. 12. 18(월) 15:42

[광산저널] ∎ “너희들이 싫어하니 갈란다.”
1946년 광주서중학교 미술교사로 초빙되었다. 욱고녀(전남여고)로, 또 광주여중으로 얼마든지 옮겨 다녔다. 그는 항상 가식이 없고, 자유분방한 차림으로 여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푸른빛이 감도는 작업복 바지를 입고 교실 문이 아닌 창문을 뛰어넘어 들어오는 일본유학파 미술선생님은 여학생들에게 선망의 로맨티스트였다. 광주여고 개교기념일에 올릴 연극무대의 그림을 맡았는데 화우인 김인규가 놀러왔다가 술판을 벌이는 바람에 그림을 못 그려 3개월 만에 그만둬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 그가 교탁에서 남긴 고별사는 “너희들이 싫어하니 갈란다.”라는 한 마디로 한동안 두고두고 회자되었다고 전한다.
∎ 소전 손재형이 설립한 진도중학교 미술선생이 되다
이후 배동신은 순천사범학교를 거쳐 이듬해 진도중학교 교사로 가게 되는데 이곳에서도 기인적 삶은 여전했다. 진도중학교는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이 세운 학교로 배동신이 최초의 미술교사다. 이사장인 손재형이 남농 허건에게 미술교사 추천을 의뢰했는데 허건이 조선대 미술교수이던 오지호 선생에게 부탁해 이뤄진 것이다. 진도중학교에는 이후 조각가 김영중, 서양화가 오승우, 서양화가 조규일로 이어지는 탄탄한 미술인맥을 형성하게 된다.
어느 날 학교에 나오지 않아 배동신 집에 찾아가보니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 시궁창에 빠졌던 것, ‘단벌신사’이었기에 옷이 없어 아내의 고쟁이를 입고 앉아 옷이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배동신은 진도에서 나와 영산포에서 잠깐 교편을 잡다가 광주로 올라왔다. 특별히 갈 곳이 없었던 그는 ‘도깨비 대학’으로 불리던 동명동 강용운 선생의 집에 얹혀살았다. 강용운의 집은 김인규, 양수아 등 일본 유학파를 비롯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날마다 모여 새벽까지 술판을 벌이는 바람에 ‘도깨비 대학’이라 붙여진 것이다.
∎ 화가들의 아지트 ⌜오센집⌟
지금의 전일빌딩 뒤편에 오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운영하던 선술집으로 ‘오센집’이 있었다. 그들은 현실과 예술 사이의 골을 메우기 위해 자주 찾았던 ‘오센집’은 동료화가들의 아지트였다. 가난했던 예술인들이 모여 콩나물에 막걸리를 먹던 집인데 모인 이들은 술잔을 앞에 놓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 유학시절을 함께 보내고 고향에 돌아와 남도 화단의 주축이 된 강용운, 양수아 와는 더욱 끈끈한 동료애를 갖고 있었다. 유학시절에 익힌 최신의 화법, 아름다움에 대한 개성과 깊이, 그림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던 이들은 그 만큼 서로 아끼고 잘 뭉쳤지만 만날 때마다 그림에 대한 논쟁을 펼치곤 했다. 배동신은 “그림은 사실에 입각한 진실이지 허구가 아니다!”라며 타협 없이 구상화에 길을 고집했다,
술에 취하면 양수아의 18번은 ‘빨간 마후라’였고 배동신은 ‘눈물에 연기나네’ 가사가 들어있는 가곡을 자주 불렀다고 한다. 배동신은 노래를 부를 때마다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어느 해 여름에는 광주 충장로 충장파출소 소장이 술병을 들고 찾아와 그날만은 제발 시내로 나오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광주에 오는 날인데 술을 먹고 충장로에서 객기라도 부리는 날에는 입장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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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광주서중학교 미술교사로 초빙되었다. 욱고녀(전남여고)로, 또 광주여중으로 얼마든지 옮겨 다녔다. 그는 항상 가식이 없고, 자유분방한 차림으로 여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푸른빛이 감도는 작업복 바지를 입고 교실 문이 아닌 창문을 뛰어넘어 들어오는 일본유학파 미술선생님은 여학생들에게 선망의 로맨티스트였다. 광주여고 개교기념일에 올릴 연극무대의 그림을 맡았는데 화우인 김인규가 놀러왔다가 술판을 벌이는 바람에 그림을 못 그려 3개월 만에 그만둬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 그가 교탁에서 남긴 고별사는 “너희들이 싫어하니 갈란다.”라는 한 마디로 한동안 두고두고 회자되었다고 전한다.
∎ 소전 손재형이 설립한 진도중학교 미술선생이 되다
이후 배동신은 순천사범학교를 거쳐 이듬해 진도중학교 교사로 가게 되는데 이곳에서도 기인적 삶은 여전했다. 진도중학교는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이 세운 학교로 배동신이 최초의 미술교사다. 이사장인 손재형이 남농 허건에게 미술교사 추천을 의뢰했는데 허건이 조선대 미술교수이던 오지호 선생에게 부탁해 이뤄진 것이다. 진도중학교에는 이후 조각가 김영중, 서양화가 오승우, 서양화가 조규일로 이어지는 탄탄한 미술인맥을 형성하게 된다.
어느 날 학교에 나오지 않아 배동신 집에 찾아가보니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 시궁창에 빠졌던 것, ‘단벌신사’이었기에 옷이 없어 아내의 고쟁이를 입고 앉아 옷이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배동신은 진도에서 나와 영산포에서 잠깐 교편을 잡다가 광주로 올라왔다. 특별히 갈 곳이 없었던 그는 ‘도깨비 대학’으로 불리던 동명동 강용운 선생의 집에 얹혀살았다. 강용운의 집은 김인규, 양수아 등 일본 유학파를 비롯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날마다 모여 새벽까지 술판을 벌이는 바람에 ‘도깨비 대학’이라 붙여진 것이다.
∎ 화가들의 아지트 ⌜오센집⌟
지금의 전일빌딩 뒤편에 오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운영하던 선술집으로 ‘오센집’이 있었다. 그들은 현실과 예술 사이의 골을 메우기 위해 자주 찾았던 ‘오센집’은 동료화가들의 아지트였다. 가난했던 예술인들이 모여 콩나물에 막걸리를 먹던 집인데 모인 이들은 술잔을 앞에 놓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 유학시절을 함께 보내고 고향에 돌아와 남도 화단의 주축이 된 강용운, 양수아 와는 더욱 끈끈한 동료애를 갖고 있었다. 유학시절에 익힌 최신의 화법, 아름다움에 대한 개성과 깊이, 그림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던 이들은 그 만큼 서로 아끼고 잘 뭉쳤지만 만날 때마다 그림에 대한 논쟁을 펼치곤 했다. 배동신은 “그림은 사실에 입각한 진실이지 허구가 아니다!”라며 타협 없이 구상화에 길을 고집했다,
술에 취하면 양수아의 18번은 ‘빨간 마후라’였고 배동신은 ‘눈물에 연기나네’ 가사가 들어있는 가곡을 자주 불렀다고 한다. 배동신은 노래를 부를 때마다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어느 해 여름에는 광주 충장로 충장파출소 소장이 술병을 들고 찾아와 그날만은 제발 시내로 나오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광주에 오는 날인데 술을 먹고 충장로에서 객기라도 부리는 날에는 입장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