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수채 화가 배동신 ⑤
입력 : 2024. 01. 25(목) 15:26

[광산저널] ∎1974년 일본전에서 ‘수채화의 거장’ 평가
마사에가 귀국할 당시 공항에서 취재했던 잡지사 기자가 전시를 주선해 일본전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배동신은 수채화 3점을 그려 보냈는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제 40점을 더 그려서 1963년 일본에서 전시회를 열기로 발표했다. 이 소식은 NHK에서 ‘이중섭과 유학했던 천재’라고 소개하면서 일본 화단에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1974년에 이루어졌다.
이는 배동신 머릿속에 완전한 구상이 끝나지 전에는 좀처럼 붓을 들지 않기 때문으로 배동신은 수채화의 본질을 찾아서 십 년을 써버린 것이다.
1974년 일본 동경 미술가 화랑과 오사카에서 열린 개인전은 그야말로 일본 미술계를 사로잡았으며 ‘수채화의 거장’이란 평가를 받았다.
배타적이기로 유명한 일본 언론이 대서특필했다. 일본 황실에서도 직접 전시장을 방문,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 주일대사는 배동신 화백에게 미국영주권을 제한할 정도로 파격적인 관심을 표명했다.
당시 일본미술협회장이던 구라다 헤이키치 씨는 “정말 놀라운 그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본 적이 없는 그림이다.”라고 극찬했다.
당시 일본 주재 대사 윤탁 씨는 일본 기자들이 일본에서 전혀 볼 수 없는 세계적인 화가라고 극찬했다. “와, 크다, 무겁다, 대담하다, 다른 사람의 그림과는 다르다. 이것이야말로 회화 자체의 창작이다,”라고 썼다고 술회했다.
그는 파리 화풍에서 영향을 받고 일본 화풍을 결합해 독창적인 조형세계를 창출했던 것이다. 인터뷰에서 그는 “유화가 육식에 비유될 수 있다면 수채화는 채식”이라고 말했다. 유화가 동적이고 극적인 감동을 연출한다면 수채화는 상큼하고 은근한 아름다움을 전해준다는 의미다. 그는 유화의 밑그림으로 인식되던 수채화를 회화의 한 장르로 격상시키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당시에는 유화에 대한 선호도가 높고 ‘예쁜 그림’에 길들여진 한국인들은 고품격의 수채화를 홀대한 나머지 우리 곁에 있었던 위대한 천재를 너무도 쓸쓸하게 보내버린 것이다.
∎걸작의 탄생
일본 유학 시절에 일본의 전설적인 화가 후쿠사이가 지인의 부탁으로 배동신에게 수탉 한 마리 그림을 의뢰한 적이 있다. 배동신은 일주일 후에 오라, 한 달 후에 오라, 6개월 후에 오라는 등으로 미루다가 3년이 흘러버린 것이다.
화가 난 후쿠사이가 찾아가 지금 당장 그려내라고 다그치자 순식간에 그렸는데 너무나 걸작이었다. 후쿠사이가 그래서 더욱 화를 냈다는 얘기도 있다.
배동신이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화실 벽에는 수탉 그림이 수십 점이 걸려 있었다. 한점 수채화를 그리기 위해 머릿속에 완전한 구상으로 수백 점의 스케치와 초상을 그렸으며 술 마시기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작업에 몰입했다.
∎천재 기인奇人 배동신
배동신은 그림을 그릴 때는 화가들은 물론 아내마저도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큰 붓을 이용한 빠른 붓질로 검객이 춤을 추듯 영혼의 세계를 화면에 인양해 냈다. 속도감 있게 뻗어 나가는 거친 붓질, 든든한 무게감과 단단한 구조적 형상미, 군더더기나 꾸밈이 없는 절제와 함축, 거칠면서도 투명하고 중후한 아름다움을 그려냈던 것이다.
술을 마시거나 얘기를 하다가도 구상이 떠올라 화상畵像이 잡히면 작업실로 뛰어 올라와 괴성을 질러가며 그림을 그렸다. 한마디로 그림을 그리며 나르시서스(희열)를 느꼈으며 그림을 그린 뒤에는 지극히 고요한 선禪의 경지에 들어가곤 했다. 그렇게 거침없이 그림을 그렸고 순수한 인생을 살았다.
마사에가 귀국할 당시 공항에서 취재했던 잡지사 기자가 전시를 주선해 일본전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배동신은 수채화 3점을 그려 보냈는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제 40점을 더 그려서 1963년 일본에서 전시회를 열기로 발표했다. 이 소식은 NHK에서 ‘이중섭과 유학했던 천재’라고 소개하면서 일본 화단에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1974년에 이루어졌다.
이는 배동신 머릿속에 완전한 구상이 끝나지 전에는 좀처럼 붓을 들지 않기 때문으로 배동신은 수채화의 본질을 찾아서 십 년을 써버린 것이다.
1974년 일본 동경 미술가 화랑과 오사카에서 열린 개인전은 그야말로 일본 미술계를 사로잡았으며 ‘수채화의 거장’이란 평가를 받았다.
배타적이기로 유명한 일본 언론이 대서특필했다. 일본 황실에서도 직접 전시장을 방문,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 주일대사는 배동신 화백에게 미국영주권을 제한할 정도로 파격적인 관심을 표명했다.
당시 일본미술협회장이던 구라다 헤이키치 씨는 “정말 놀라운 그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본 적이 없는 그림이다.”라고 극찬했다.
당시 일본 주재 대사 윤탁 씨는 일본 기자들이 일본에서 전혀 볼 수 없는 세계적인 화가라고 극찬했다. “와, 크다, 무겁다, 대담하다, 다른 사람의 그림과는 다르다. 이것이야말로 회화 자체의 창작이다,”라고 썼다고 술회했다.
그는 파리 화풍에서 영향을 받고 일본 화풍을 결합해 독창적인 조형세계를 창출했던 것이다. 인터뷰에서 그는 “유화가 육식에 비유될 수 있다면 수채화는 채식”이라고 말했다. 유화가 동적이고 극적인 감동을 연출한다면 수채화는 상큼하고 은근한 아름다움을 전해준다는 의미다. 그는 유화의 밑그림으로 인식되던 수채화를 회화의 한 장르로 격상시키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당시에는 유화에 대한 선호도가 높고 ‘예쁜 그림’에 길들여진 한국인들은 고품격의 수채화를 홀대한 나머지 우리 곁에 있었던 위대한 천재를 너무도 쓸쓸하게 보내버린 것이다.
∎걸작의 탄생
일본 유학 시절에 일본의 전설적인 화가 후쿠사이가 지인의 부탁으로 배동신에게 수탉 한 마리 그림을 의뢰한 적이 있다. 배동신은 일주일 후에 오라, 한 달 후에 오라, 6개월 후에 오라는 등으로 미루다가 3년이 흘러버린 것이다.
화가 난 후쿠사이가 찾아가 지금 당장 그려내라고 다그치자 순식간에 그렸는데 너무나 걸작이었다. 후쿠사이가 그래서 더욱 화를 냈다는 얘기도 있다.
배동신이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화실 벽에는 수탉 그림이 수십 점이 걸려 있었다. 한점 수채화를 그리기 위해 머릿속에 완전한 구상으로 수백 점의 스케치와 초상을 그렸으며 술 마시기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작업에 몰입했다.
∎천재 기인奇人 배동신
배동신은 그림을 그릴 때는 화가들은 물론 아내마저도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큰 붓을 이용한 빠른 붓질로 검객이 춤을 추듯 영혼의 세계를 화면에 인양해 냈다. 속도감 있게 뻗어 나가는 거친 붓질, 든든한 무게감과 단단한 구조적 형상미, 군더더기나 꾸밈이 없는 절제와 함축, 거칠면서도 투명하고 중후한 아름다움을 그려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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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거나 얘기를 하다가도 구상이 떠올라 화상畵像이 잡히면 작업실로 뛰어 올라와 괴성을 질러가며 그림을 그렸다. 한마디로 그림을 그리며 나르시서스(희열)를 느꼈으며 그림을 그린 뒤에는 지극히 고요한 선禪의 경지에 들어가곤 했다. 그렇게 거침없이 그림을 그렸고 순수한 인생을 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