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동산을 품은 마을에 예술이 스며들다
마을 중심 둥글고 야트막한 동산 오래전부터 둥글메·도르메
선거이 정려, 숙부인 전주이씨 사적비, 국창 임방울 생가터
장강(長岡) 박하 공장 1939년 건설 식민지 수탈 목적 설립해
도시재생 벽화사업, ‘송정꼬부랑 동화마을’ 조성 생동감
선거이 정려, 숙부인 전주이씨 사적비, 국창 임방울 생가터
장강(長岡) 박하 공장 1939년 건설 식민지 수탈 목적 설립해
도시재생 벽화사업, ‘송정꼬부랑 동화마을’ 조성 생동감
입력 : 2022. 05. 24(화) 17:05

[광산저널] 도산동은 마을 중심에 둥글고 야트막한 동산이 있어 오래전부터 ‘원산’, ‘둥글메’, ‘도르메’, ‘도르미’ 등으로 불려오다 1986년부터 도산동이 됐다. 조선시대 고내상면에 속했으며 도상촌(道上), 도하촌(道下), 산정촌(山亭), 도신촌(道新), 수성촌(水城)이 있었다.
도산동의 주요 문화유적으로는 선거이 정려와 숙부인 전주이씨 사적비, 국창 임방울 생가터가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박하 공장과 술도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선거이 정려(도산동 698-2)는 원도산 마을에 있는데, 조선 중기 무신, 선거이 장군(1550~1598)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본래 1801년(순조 1년) 고내상에 세운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 옆에는 선태식의 처 ‘이 씨’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1931년에 지은 숙부인 전주이씨 사적비 1기와 1913년 기우만이 쓴 효열부 이 씨 사적도 함께 있다.
선거이 장군은 장흥에서 태어나 광산으로 옮겨와 1570년 식년 무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 당시 진도군수로 있으면서 이순신 장군과 한산도대첩에서 왜군을 물리쳤고, 권율 장군과는 행주대첩을 이끌며 큰 공을 세웠다.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다가 1598년 경주에서 전투 중 전사했다고 알려졌다. 다른 기록에는 울산전투에서 명나라 양호를 돕다 전사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2016년 제60보병사단 16연대는 이순신과 함께 육지와 바다를 오가며 공을 세운 장군을 기리기 위해 부대 이름을 ‘선거이 연대’로 명명했다.
일제강점기 도산리의 가장 위쪽에 있는 상도산 마을 끝자락에는 일본인이 세운 술도가가 있었다. 광복 후 나정균이 인수해 ‘금봉주조회사’로 이름을 바꿔 운영했다. 최고급 술 청주를 만들었던 이 회사가 한창일 때는 종업원 수만 70~8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또 신도산 마을 남쪽에는 일본인이 설립한 박하 공장이 있었는데 공장이 들어서며 마을이 형성되었다. 1923년 송정면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들여와 시험 재배한 것이 시초다. 작황이 좋아 점차 재배면적이 늘어나 1925년에는 박하재배조합이 설립되었고, 급기야 공장까지 설립하게 되었다.
장강(長岡) 박하 공장은 1939년 건설됐는데 식민지 수탈을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나 다름없다. 토지와 임금이 낮아 일본보다 생산비가 덜 들었기 때문이다. 이 공장은 광복 후 얼마간 한국인이 인수하여 경영하다가 폐업하고, 그 자리에 정부미 방앗간과 얼음 공장이 가동되다 아파트가 들어서며 사라졌다. 현지 주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지금의 서경, 우미아파트 일대에 있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도산동이 낳은 인물로 국창 임방울이 있다. 판소리 춘향가 중 ‘쑥대머리’로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일약 스타가 되었던 임방울 선생은 계면조를 통해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과 한을 노래했다.
화려한 무대보다는 시골의 장터나 강변의 모래사장을 찾아 노래했던 진정한 광대다. 도산동에는 생가터가, 송정공원 내에는 기념비가, 광산문화예술회관 앞에는 기념 동상이 있고, 지하철 1호선 송정역에는 작은 전시관이 있다.
도산동은 신도심과 다르게 아파트보다 주택들이 모여 골목을 이루고 있는 구도시다. 곳곳의 빈터를 미니 텃밭처럼 가꾼 모습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지난 2020년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주택 담벼락에 생동감 넘치는 그림을 그려 골목을 아기자기하게 꾸민 ‘예술이 마을에 스며들다’ 사업이 완료됐다. 이어 2021년 도시재생으로 벽화사업을 추진, ‘송정꼬부랑 동화마을’을 조성해 한층 생동감 있고 활기 넘치는 거리를 만들었다.
전통적인 마을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도산동이지만, 앞으로 변화의 바람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골목길이 아직 살아있을 때 느긋하게 벽화 거리를 거닐어 보자. 햇살 좋은 봄, 바람 좋은 가을, 걷다 보면 SNS 감성 사진도 한 컷 건질 수 있을 것이다.
도산동의 주요 문화유적으로는 선거이 정려와 숙부인 전주이씨 사적비, 국창 임방울 생가터가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박하 공장과 술도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선거이 정려(도산동 698-2)는 원도산 마을에 있는데, 조선 중기 무신, 선거이 장군(1550~1598)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본래 1801년(순조 1년) 고내상에 세운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 옆에는 선태식의 처 ‘이 씨’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1931년에 지은 숙부인 전주이씨 사적비 1기와 1913년 기우만이 쓴 효열부 이 씨 사적도 함께 있다.
선거이 장군은 장흥에서 태어나 광산으로 옮겨와 1570년 식년 무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 당시 진도군수로 있으면서 이순신 장군과 한산도대첩에서 왜군을 물리쳤고, 권율 장군과는 행주대첩을 이끌며 큰 공을 세웠다.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다가 1598년 경주에서 전투 중 전사했다고 알려졌다. 다른 기록에는 울산전투에서 명나라 양호를 돕다 전사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2016년 제60보병사단 16연대는 이순신과 함께 육지와 바다를 오가며 공을 세운 장군을 기리기 위해 부대 이름을 ‘선거이 연대’로 명명했다.
일제강점기 도산리의 가장 위쪽에 있는 상도산 마을 끝자락에는 일본인이 세운 술도가가 있었다. 광복 후 나정균이 인수해 ‘금봉주조회사’로 이름을 바꿔 운영했다. 최고급 술 청주를 만들었던 이 회사가 한창일 때는 종업원 수만 70~8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또 신도산 마을 남쪽에는 일본인이 설립한 박하 공장이 있었는데 공장이 들어서며 마을이 형성되었다. 1923년 송정면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들여와 시험 재배한 것이 시초다. 작황이 좋아 점차 재배면적이 늘어나 1925년에는 박하재배조합이 설립되었고, 급기야 공장까지 설립하게 되었다.
장강(長岡) 박하 공장은 1939년 건설됐는데 식민지 수탈을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나 다름없다. 토지와 임금이 낮아 일본보다 생산비가 덜 들었기 때문이다. 이 공장은 광복 후 얼마간 한국인이 인수하여 경영하다가 폐업하고, 그 자리에 정부미 방앗간과 얼음 공장이 가동되다 아파트가 들어서며 사라졌다. 현지 주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지금의 서경, 우미아파트 일대에 있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도산동이 낳은 인물로 국창 임방울이 있다. 판소리 춘향가 중 ‘쑥대머리’로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일약 스타가 되었던 임방울 선생은 계면조를 통해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과 한을 노래했다.
화려한 무대보다는 시골의 장터나 강변의 모래사장을 찾아 노래했던 진정한 광대다. 도산동에는 생가터가, 송정공원 내에는 기념비가, 광산문화예술회관 앞에는 기념 동상이 있고, 지하철 1호선 송정역에는 작은 전시관이 있다.
도산동은 신도심과 다르게 아파트보다 주택들이 모여 골목을 이루고 있는 구도시다. 곳곳의 빈터를 미니 텃밭처럼 가꾼 모습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지난 2020년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주택 담벼락에 생동감 넘치는 그림을 그려 골목을 아기자기하게 꾸민 ‘예술이 마을에 스며들다’ 사업이 완료됐다. 이어 2021년 도시재생으로 벽화사업을 추진, ‘송정꼬부랑 동화마을’을 조성해 한층 생동감 있고 활기 넘치는 거리를 만들었다.
전통적인 마을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도산동이지만, 앞으로 변화의 바람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골목길이 아직 살아있을 때 느긋하게 벽화 거리를 거닐어 보자. 햇살 좋은 봄, 바람 좋은 가을, 걷다 보면 SNS 감성 사진도 한 컷 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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